2009 명동이야기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예술혼은 지금도 뜨겁다 2009.05.03

자료창고 Архив 2009. 5. 4. 11:56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 예술혼은 지금도 뜨겁다

문화가 머물고 戰後문학에서 통기타까지

이후남 | 제112호 | 20090503 입력 중앙선데이
‘경성에서는 “이봐, 한잔 하러 가지.” “좋지. 남촌에서 할까, 북촌에서 할까”라는 것이 선결문제이다. 남촌, 북촌은 경성의 번화가인 본정(本町)과 종로를 말하는 것인데 경성거리 중앙을 흐르는 청계천을 경계로 남쪽으로는 본정이, 북쪽으로는 종로의 번화가가 있다. 본정은 내지인(일본인) 거리이고 종로는 순수한 조선거리이다…종로에서 놀다가 본정으로 장소를 바꾸고자 할 때 ‘강을 건너자’는 말을 자주 쓰게 된다.’("일본 잡지 ‘모던 일본’과 조선1940" 중에서)

이는 일본인 기자가 1940년 쓴 ‘경성 번화가 탐방기’의 첫 대목이다. 이어지는 글은 ‘본정’을 당시의 명치정(明治町)까지, 즉 명동 일대를 아우르는 말로 쓰고 있다.
‘조선은행(현 한국은행)과 미쓰코시(현 신세계백화점) 사이의 광장을 가로지르는 우체국 옆에서부터 본정 일정목이 시작된다…남산목욕탕 2층의 고급 다방 남령은 게이샤와 유한마담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고, 반대편 영화관 명치좌(明治座·현 명동예술극장) 쪽으로 향해서 가면 후유노야도가 있다.

왼쪽 석조 건물이 조선은행(현 한국은행)이며 그 옆(중앙 부분)에 있는 건물이 조선상업은행(옛 상업은행) 이다. 오른쪽의 건물이 우체국이다.
이곳은 명곡을 자주 듣는 음악 애호가와 문학 청년들이 자주 모이는 곳이고, 명치좌에서 조지야(옛 미도파, 현 롯데영플라자)를 향하는 오른편에 있는 제일다방은 극영화, 미술가, 호화로운 이들이 모이는 장소인 듯하다…이곳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카페는 ‘마루비루’이다…이곳의 여종업원들은 모두 내지인이다.’

이처럼 명동은 일제시대부터 번화한 거리였다. 조선시대 주택가였던 명동에 변화가 닥친 건 구한말의 격동기와 함께다. 중국대사관이 지금의 위치에 자리한 것도 그런 흔적이다. 갑신정변 이후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부대가 여기에 주둔한 데서 유래했다. 비슷한 무렵에 일본인들이 자리 잡기 시작한 곳은 진고개, 즉 충무로 일대다. 한일병합으로 일본인들의 조선 진출은 더욱 많아졌고, 충무로와 가까운 명동이 두루 일본인 거리가 됐다.

서양 신문화 소개된 주무대
일본을 거쳐온 서양의 신문화가 조선에 등장하는 주무대 역시 명동 일대였다. 백화점이 그 한 예다. 첫 주자인 미쓰코시 백화점은 1930년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지하 1층, 지상 4층의 새 건물을 세웠다. 이듬해 조선인 자본의 화신백화점(현 종로타워)이 문을 연 곳은 당연한 듯 종로였다. 북촌과 남촌의 다른 분위기는 극장에도 나타났다. 북촌에는 대개 조선인 변사가, 남촌에는 일본인 변사가 주로 활동했다. 당시의 극장은 영화와 공연을 겸하는 것이 흔했다. 명동의 명치좌 역시 그중 하나였다.

해방과 함께 명치정은 명동이란 지금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극장 명치좌도 47년 서울시의 공공극장을 뜻하는 시공관(市公館)으로 이름이 바뀐다. 오페라 ‘춘희’(48년), 셰익스피어극 ‘햄릿’(49년)이 각각 국내 초연됐고, 각종 대중문화도 공연됐다.
한편 국립극장은 창립 당시에는 부민관(府民館·경성부민, 즉 일제시대 서울시민을 위한 극장이라는 뜻·현 서울시의회)이 주무대였다. 하지만 50년 창립한 지 얼마 안 돼 6·25가 발발한다. 피란길에서 돌아와 다시 찾은 명동은 예전 모습이 아니었다.

‘포화 속에 타버리고 무너져 반 조각이 되어버렸다. 명동 입구에서부터 문예서점, 명동극장, 국립극장 쪽만 남기고 건너편 동순루를 비롯해 많은 건물이 허물어졌다. 마돈나, 코롬방, 충무로로 통하는 명동거리가 절반이 타버려 명동장, 무궁원, 돌체, 휘가로가 빈터만 남아 있었다…국립도서관(현 롯데호텔) 건너편 책가게 2층엔 문총이 자리를 잡고 재빨리 재건운동이 시작되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김동리, 조연현을 비롯한 많은 그리운 얼굴들이 나타났다…’(이봉래 저 '명동백작' 중에서)

국립극장은 피란 시절을 거쳐 57년 시공관에 새 둥지를 튼다. 일종의 더부살이였다. ‘시공관’과 ‘중앙국립극장’이라는 두 현판이 나란히 내걸렸다. 국립극장 전용이 된 건 61년이다. 광화문에 새로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선 덕분이다. 통칭 시공관에서는 무용·연극·오페라·독주회 등 다양한 공연은 물론이고 56년 민주당 전당대회(장면 부통령이 권총에 맞아 경상을 입는 사건도 벌어진다), 57년 제1회 미스코리아대회 등 갖은 행사가 열렸다. 명동 역시 그 모든 장르의 문화인이 두루 모이는 용광로였다.

‘열두어 평 남짓한 다방 안은 언제나 걸죽하게 내뿜는 담배연기와 술냄새가 범벅이 돼 있었다…이 바닥에서의 주인은 따로 있다. 다방주인 마담은 터줏대감 노릇을 자임해 오는 몇몇 문객(文客)들 눈치보기가 노상 바빴다…시인, 소설가, 평론가, 연극인, 영화인, 음악인, 잡지·신문기자, 출판인, 만화가, 문학청년 등등 문학과 예술장르에 사돈의 팔촌쯤 얽혀도 죄 모여들어 들볶아치는 동방싸롱은 그야말로 방귀깨나 뀌는 장안의 유명 예술인은 모두가 모여들었다’(김시철 저 '격랑과 낭만' 중에서)

‘낭만과 추억’ 에피소드 가득
동방싸롱만이 아니다. 다방·술집이 문화공간의 주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명동역사의 특징이다. 격랑과 낭만은 그 이유를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 상황과 연관 짓는다. ‘문인들에게는 기다리는 집도, 마련해둔 재보도 있을 리 만무였다. 여차하면 동가숙 서가식 하는 번거로움이 따를 뿐 낮에는 곧 다방이 내 집이었다.’ 즉 그 무렵의 다방은 몇 푼 안 되는 원고료를 기다리는 사무실이자, 글도 쓰는 집필실이었다. 흘러나오는 음악을 즐기는 감상실 기능도 중요했다.

팔순을 넘어선 배우 장민호(85)씨도 동방싸롱을 기억한다. “이해랑 선생의 부인이 운영을 했어요. 생활비 좀 보태려고 한 건데, 차 한잔도 겨우 마실까 말까 하면서 하루 종일 앉아들 있으니 만날 적자에, 속타고 속상했겠지.” 그렇게 모여든 문화예술인들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명동의 역사를 새로 이어갔다.

패션도 중요한 대목이다. 디자이너 노라노(81)씨는 종로를 거쳐 55년부터 30여 년간 명동에 옷가게 겸 작업실을 열었다. 지금처럼 청담동으로 옮긴 것은 90년의 일이다. 명동과 그의 인연은 사실 더 거슬러 올라간다. 2년간 미국 유학을 마치고 서울에 돌아온 40년대 말부터 시공관에 올려진 각종 공연 의상을 단골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명동의 기억나는 공간을 여럿 꼽았다. 피가로·라일구·돌체·코지코너 등의 다방과 송옥·국제·아리사·보그·한 등의 양장점, 신일 양화점, 유니 미장원, 향원·곱창집·명동칼국수·신정·삼오정·한일관·태극당·오비스캐빈 등의 음식점 등. 정작 즐겨 가던 곳을 물으니 “나가서 먹을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답변이다. “일하느라고 바빠서였죠. 신정에서 국수나 좀 사먹었을까. 손님이 오면 사보이호텔에 가고.” 당시에도 멋쟁이임에 틀림없었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많았던 모양이다.

일제시대 주먹으로도 이름을 날렸던 국회의원 김두한씨와 어느 다방에서 조우한 일화가 흥미롭다. “(모르는 사이인데도) 쓱 보더니,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나를 불란서 대사로 보내겠다고 하더군요.” 그 무렵에는 정치 역시 명동과 멀지 않았다. 70년대 여의도에 국회의사당이 세워지기 이전까지 부민관(현 서울시의회)에 국회가 있었다.

명동예술극장, 다음 달 5일 첫 공연
배우 서희승(57)씨는 국립극장의 명동 시절 막바지인 72년 초 연구생으로 국립극단 단원이 됐다. “옛집·대구집이라고 빈대떡집이 있었는데, 막걸리 한 주전자에 250원이었어요. 공연 뒤풀이요? 위계질서가 엄격한 분위기라 저 같은 막내가 끼어드는 건 언감생심이었죠. 장민호 선생님이 영화나 드라마 한 편 하시고 출연료를 받아오는 날이면, 선생님 가방을 들어 드린다면서 따라가곤 했죠.” 그는 당시의 국립극장을 두고 “발레·봉산탈춤에서 연극사까지 여느 대학에서 배울 수 없는 모든 것을 배우는 실전학교였다”며 “그때 배운 열정이 지금까지 무대에 서게 하는 힘”이라고 말했다.

국립극장이 73년 남산의 새 건물로 옮겨간 후에도 명동의 연극사는 한동안 이어졌다. 무대에 목마른 연극인들은 소극장연극·살롱연극으로 갈증을 메우려 했다. 엘칸토예술극장, 살롱 떼아뜨르, 떼아뜨르 추, 삼일로 창고극장 등 소극장이 활발하게 관객을 모았다. 연극평론가 구히서(70)씨는 “장소만 있으면 (연극을)하려고들 했다”고 돌이킨다. “YWCA 건물의 청개구리집, 충무로 연극협회 소극장, 설파다방, 제일백화점 꼭대기에도 공연장이 있었고….” 요일마다 프로그램을 바꿔 운영하던 청개구리집은 70년대 포크가수들의 산실로도 이름을 남겼다. 오비스캐빈·쉘부르 등도 70년대 통기타 라이브공연과 생맥주로 유명한 공간이었다.

국립극장이 떠난 이후로 강산이 세 번쯤 바뀌었다. 지금 옛 자리와 외모를 이어받은 명동예술극장이 문을 열 참이다. 11일부터 개관기념 전시회가, 곧이어 다음 달 5일 첫 공연 ‘맹진사댁 경사’가 시작된다. 장민호(맹노인 역)·신구(맹진사 역)·서희승(참봉 역) 등 이번 공연에 설 선배 배우들은 지난달 28일 한참 나어린 후배들과 함께 명동예술극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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