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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23 [몽골여행] 몽골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몽골편 경향신문

[몽골여행] 몽골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몽골편 경향신문

여행기펌 temdeglel 2009. 5. 23. 09:47


1.전통과 현대를 어우러진 울란바타르 - 현대화의 상징 매연, 초원도시 뒤덮다 2009.05.13 경향닷컴

우리의 초원 실크로드 답사는 크게 대흥안령과 몽골, 그리고 시베리아의 3대 초원로 답사를 망라한다. 워낙 긴 노정이라서 한꺼번에는 답파할 수가 없어 지난 3년간 몇 구간으로 나눠 진행했다. 그 시기도 들쭉날쭉하거니와 길벗도 매번 달랐다. 몽골 초원로 답사만 해도 여름과 겨울 두 번 나눠 진행했다. 필자로서는 이 길에 첫 발을 내디딘 지 강산이 네 번이나 변한 뒤의 일이라서 실로 감개무량했다.

매연이 자욱한 울란바토르시.

2008년 1월11일(월요일) 오후 1시20분 인천국제공항을 이륙한 EK(대한항공) 867편은 곧바로 기수를 북쪽으로 향한다. 서해의 만경창파가 너울거린다. 지상의 날씨는 꽤 화창하지만 하늘에서는 구름떼가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고비사막 언저리에 들어설 무렵에는 난류(亂流) 때문에 기체가 심하게 요동친다. 내내 안전띠를 풀지 못한 채 비행기는 가까스로 시속 650㎞를 유지하면서 고도 1000피트를 오르락내리락한다. 그런 속에서도 기내 점심 한끼는 그럴싸했다. 5㎝의 길이로 네모반듯하게 자른 두부는 어머니의 손맛을 느낄 정도로 맛깔스러웠다. 전통음식의 국제화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약 2시간45분 동안 날아서 현지시간 오후 3시5분에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전번 OM(몽골항공) 302편보다는 약 30분 앞당긴 셈이다. 울란바토르와 서울 간의 시차는 여름엔 없으나, 겨울엔 서울이 1시간 이르다. 바깥 기온은 영하 20도를 웃돈다고 하지만 개인 날씨에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그런지 별로 추운 느낌이 안 든다.

그런데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숨 막힐 듯 매연이 엄습한다. 시내에 들어서니 길 좌측에 있는 화력발전소 굴뚝에서는 뿌연 연기가 타래타래 솟구친다. 이런 발전소가 이곳에 3개가 더 있다고 한다. 우측에 있는 가죽공장이며 빵공장에서도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난다. 공장은 물론, 겨울철 난방도 모두 연탄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창 공장 건설 붐이 일어나고 있다니, 이 맑디맑은 초원에서 매연을 마구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도시의 생태적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될까. 시름이 가는 대목이다.

몽골어로 ‘붉은 영웅’이란 뜻의 울란바토르는 몽골인민공화국의 수도로서 몽골고원의 중부 헨티산 남쪽 기슭의 툴라강가에 자리하고 있다. 고도 1350m의 초원풍이 짙은 현대도시다. 남북은 산으로 에워싸여 있고 동서로 흐르는 툴루강을 따라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에 속한 이곳 연 평균기온은 영하 2.9도로서 겨울 최저기온이 영하 40도에 육박하며 여름 최고기온은 35도에 달한다. 울란바토르는 몽골의 정치·경제 문화의 심장이다. 공업생산액이 전국 공업 총생산액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니 그 높은 비중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인구는 몽골 전체 인구 280만명 중 약 47%에 해당한 13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 가운데 70%는 젊은이들이라고 하니 활기찰 법도 한 도시다. 4명 중 한 명이 학생일 정도로 향학열도 높은 편이다. 현대화로 치닫는 전통사회의 상례(常例)라고나 할까 이 도시에도 개혁·개방의 열풍이 바야흐로 밀려오고는 있지만,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의지와 자부심도 함께 실감하게 된다.

칭기즈칸 호텔에 여장을 푼 다음날 아침, 우선 앞으로 있을 긴 시베리아 여정에 대비한 채비로 칭기즈칸 백화점에 들렀다. 이름난 몽골 소시지며 빵, 김치(한국) 등 먹거리를 구입했다. 상품의 60%는 중국산이고 30%는 한국산이다. 한국산치고 없는 것이 없다. 그런데 한국산 가운데 60%는 ‘나쁜 사람’(불법 밀수꾼)들에 의해 거래되는 것이라고 4년간 한국에서 일하다 돌아온 현지 안내원이 귀띔한다.

간단한 쇼핑을 마치고 수하바타르 광장을 찾았다. 광장 한가운데 1946년에 세운 수하바타르 기마동상이 웅비하고 있다. 수하바타르는 1921년 몽골혁명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1923년 30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영웅적 인물이다. 동상의 좌대에는 이런 글귀가 새겨져 있다. “우리 인민이 하나의 방향에서, 하나의 의지로 단결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얻지 못할 것이란 하나도 없고, 우리가 알지 못할 것도 없으며 불가능한 일도 없을 것이다.” 가슴 깊이 파고들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고 있는 말이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 울란바토르시.


이어 광장에서 남쪽으로 3㎞쯤 떨어진 자이산 언덕에 자리한 승전기념탑에 올랐다. 영하 20도를 훨씬 넘는 한겨울에 100개쯤 되는 돌계단을 조심조심 밟고 올라가니 저마다의 입가에는 성에가 희부옇게 끼었다. 1971년에 세운 이 기념비 정상의 한가운데는 전통적 몽골 등(燈)이 놓여 있으며, 그 주위는 폭 3m에 길이 60m나 되는 둥근 철근 콘크리트 벽이 에워싸여 있다. 벽의 외측에는 몽골의 전통 문양을 배경으로 소련과 몽골의 각종 훈장과 메달이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내측에는 두 나라의 우의와 상호원조를 상징하는 모자이크 벽화가 쭉 그러져 있다. 그중에는 일제와 나치 독일의 깃발을 밟아 찢는 인상적인 장면도 눈에 띈다. 이 기념탑 곁 산정에는 하늘 높이 휘날리는 깃발을 배경으로 하고 한 손에 무기를 굳게 잡은 한 병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흥미 있는 것은 이 기념탑과 나란히 파란 천 조각이 나팔거리는 오보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이 탑의 수호신 역할을 기대해서일 것이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울란바토르시가 한눈에 안겨 온다. 시 전체가 자욱한 연기 속에 묻혀 있다. 그리고 왼편으로 눈을 돌리니 한국 조계종이 선사한 커다란 금불상이 빛을 발하고 있다. 안내원의 말에 의하면 몽골에서 가장 큰 불상의 높이가 26m로서 그 이상을 초과할 수 없다는 불문율 때문에 저 금불상의 높이는 25m에 그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보면, 무엇이나 최대 최고가 으뜸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으뜸은 실속에 있다.

이 기념비에서 좀 떨어진 곳에는 우리의 애국지사 대암 이태준(大岩 李泰俊) 선생의 기념공원과 묘가 자리하고 있다. 선생은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1907년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해 1911년에 제2회로 졸업한다. 안창호 선생이 만든 ‘청년학우회’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2년 중국 난징(南京)으로 망명해 ‘기독교의원’에서 의사로 활동한다. 그러던 중 김규식 선생의 권유로 몽골 후레로 가서 ‘동의의국’이라는 병원을 차려 당시 몽골에 유행하던 화류병 퇴치에 앞장서면서 몽골 마지막 황제의 주치의가 된다. 그 공로로 1919년 몽골정부로부터 ‘에르데닌 오치르’라는 최고 훈장을 받는다. 그러다가 1921년 2월 일본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러시아 백군(白軍)에게 피살된다. 향년 38세의 젊은 나이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열사의 숭고한 얼은 영생불멸할 것이다.

다음으로 발길을 옮긴 곳은 복트칸 궁전박물관이다. 원래 이곳은 혁명 전에는 제8대 활불(活佛)의 동궁이었다. 만청 양식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금의 건물은 1919년에 지은 것으로서 못 하나 안 쓰고 순 나무로 지었다는 특징이 있어 보존가치가 높다. 최근에는 중국 측의 원조로 말끔히 복원되어 가고 있다. 관내에는 제8대 활불이 쓰던 생활용품과 티베트 불교의 만다라(曼茶羅)와 불상, 그리고 독일 황제가 보내온 조류 박제품을 비롯해 각국에서 헌납한 각종 동물 박제품이 눈길을 끈다. 많은 그림도 걸려 있는데, 그중 한 점이 웃음을 자아낸다. 모임에 지각하는 자는 벌주로 큰 대야에 담은 마유주를 마시게 한 다음 억지로 토하게 하고는 모임에 참석하도록 하는 해학적인 장면의 그림이다.

반년 전 울란바토르를 찾았을 때도 여러 박물관과 유적들을 둘러봤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자연사박물관은 깊은 인상을 남겨놓았다. 1924년에 개관한 이 박물관에는 각종 광물자원과 동식물 표본, 그리고 신·구석기류가 전시되어 있다. 특히 고비사막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출토된 대형 공룡의 골격 표본은 이 박물관의 백미로서 일찍부터 고생물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왔다. 기괴한 운석이나 공룡 알 화석은 신비감마저 자아낸다. 그 밖에 1838년 제5대 활불이 세운 간단 사원은 티베트식 불교사원으로서 작금 민족문화 부흥운동의 상징으로 중시되고 있다. 한때 사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가 1940년에 회복된 후 1970년에는 사내에 종교대학이 문을 열어 불교 진흥에 기여하고 있다. 경내에는 라마교식으로 오체투지하는 모습도 보인다. 관음당에는 높이 25m의 대형 관음상이 모셔져 있는데, 이 상은 맹인인 제8대 활불(1911~1924 재위)이 치유를 기원해 세운 ‘개안(開眼)관음’이다. 이러한 유적지 말고도 가볼 만 곳으로는 몽골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민족역사박물관이나 자나바자르 미술관 등이 있다. 그리고 근교에는 전통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산 중턱에 칭기즈칸 초상이 그려진 울란바토르시.

울란바토르 시내를 거닐다 보면, 이 도시가 발달해 온 연혁과 현재의 모습에서 세계 도시사에서 보기 드문 특이한 점들을 발견하게 된다. 원래 도시는 정치적 중심지로서의 도읍이나 상업적 중심지로서의 시장으로부터 싹터서 형성 발달하는 것이 통칙이다. 그러나 울란바토르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애초부터 줄곧 이동이 상습화된 유목공간에서 태어난 초원도시로서 정착에 의한 도읍이나 시장으로 출발할 수는 없었다. 대신 이 도시의 맹아는 1639년 첫 활불이 헨티산에 이동사원인 게르사원(‘오르고’)을 세운데서 싹트기 시작했으며, 이때부터 약 140년간 그 부근을 ‘오르고’라고 불러왔다. 활불이 운영하는 이 이동사원이 번성함에 따라 사람들이 모여들자 시장이 생겨나고 사람들을 관리할 행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급기야 18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게르사원이 점차 정착하게 되었으며, 그것이 정주 도시화의 단초가 되었다. 이렇게 도시화의 정초(定礎)가 마련되어 가다가 드디어 18세기 말엽에 오늘의 울란바토르 동편에 시가가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그곳을 ‘쿠룬’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24년 몽골인민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울란바토르로 개명하고 정식 국도로 삼았다. 이렇듯 370년의 역사를 지닌 울란바토르는 세계 도시사에서 하나의 특이한 전범을 만들어냈다. 도시사 중심의 역사연구가 하나의 방법론으로 제시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이것은 시사하는 바가 자못 크다고 하겠다.

이러한 전범과 더불어 오늘날 울란바토르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색다른 도시의 면모를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몽골 친구의 말에 의하면, 현대적 시설을 갖춘 도시의 아파트에서 사는 젊은이들은 아파트가 사는 데 편리하기는 하지만 통풍이 되지 않아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래서 주말은 근교에 사는 부모 집에서 보내고, 여름휴가 때는 조부모가 사는 초원에 가서 보낸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늙은이들은 탁 트인 초원공간에서 살고 싶어 밀폐된 아파트를 기피하니 울란바토르 인구의 70%는 젊은이들일 수밖에 없다. 도심의 아파트와 근교에 널려있는 게르, 도시의 정주와 초원의 유목은 분명 전통과 현대의 아우름이다. 우리네 성황당에 맞먹는 오보가 전승기념탑을 지켜주듯, 어디를 가나 지천에 깔려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전통과 현대의 엄연한 공존이다. 그밖에 일상의 행위나 예의범절, 가치관이나 도덕관 등에서도 이러한 현상은 얼마든지 감지하게 된다.


2.
몽골제국의 첫 수도 카라코룸 - 천하호령하던 ‘제국의 심장’을 느끼다 2009.05.20 경향닷컴

일행 20명은 다섯 대의 미니 밴에 나눠 타고 울란바토르를 떠났다. 모두 10만㎞ 이상씩을 달린 허름한 구 소련제 차라서 먼 길을 무사히 달릴지 조금은 걱정이 들었다. 이제부터 가야 할 초원과 사막 길은 녹녹잖은 비포장길이다. 이른 시간이라서 거리는 한산하다. 가는 길은 초원길이지만 왼편엔 황막한 고비 사막이 펼쳐진다. 우리가 탄 2호차 기사 도고는 20대 후반의 건장한 젊은이로서 성격도 명랑하다. 내내 속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그 어려운 길을 헤쳐가면서도 상 한번 찌푸리는 일이 없다.


시내를 갓 벗어나자 초원을 가르며 북쪽으로 아스라이 뻗어간 두 갈래의 철길이 나타난다. 베이징에서 이곳을 지나 모스크바까지 가는 기찻길이다. 마침 러시아에서 목재를 가득 실은 화물차가 지나간다. 순간 50여년 전 이 철도가 개통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베이징~모스크바행 국제열차를 타고 이곳을 지나던 일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당시 이 길이 열리면서 베이징~모스크바 간의 철도 여정은 3일이나 앞당겨졌다. 1958년 이집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올 때 열차로 프라하에서 모스크바까지 이틀간, 모스크바에서 베이징까지는 동북 만저우리(滿州里)를 에돌아 오기 때문에 열하루가 걸렸다. 그 시절 차량은 비록 노후하고 설비는 허술했지만, 이 철마를 함께 타고 오가는 사람들의 마음만은 따뜻하고 훈훈했다. 서로 잔을 주고 받으며 노래도 함께 부른다. 한 소련(현 러시아) 친구가 푸슈킨의 시집을 선물로 준 일이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하다. 여러 인종을 아우르며 동행하는 국제열차,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지향하는 국제공동체의 한 표본이 아니겠는가.

나름대로 정비한 데다가 새로 맞은 손님에게 솜씨라도 보여주려는 듯, 다섯 대의 밴은 서로가 앞을 다투며 드넓은 초원 길을 쏜살같이 질주한다. 오늘 일정은 불간산 기슭의 첸헤르까지 무려 514㎞에 달하는 장거리를 주파해야 하니 전속을 낼 수밖에 없다. 근 5시간을 달려 반사막 반초원의 다신칠렌 벌판에 이르렀다. 울란바토르의 한국 식당에서 마련한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나서 쉴 틈도 없이 길을 재촉한다. 이윽고 질펀한 벌판이 나타나더니 게르를 운반하는 트럭 한 대가 길을 헛갈리는 바람에 그만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광경과 맞닥뜨렸다. 온 가족(5명)이 앞뒤에서 끌고 밀면서 안간힘을 써보지만 빠진 트럭은 요지부동이다. 게르를 해체한 자재와 가재들이 빼곡히 실려 있다. 우리네 4호차가 로프를 걸어 가까스로 구출해 냈다. 어제 한 차례 소나기가 훑고 지나가서 땅이 온통 진창으로 변했다. 우리네 밴은 마른 땅을 요리조리 골라가면서 용케도 위기를 모면했다.

트럭에 게르와 가재를 싣고 어디론가 떠나가는 이들은 전형적인 몽골 이동 유목민의 일가다. 일반적으로 몽골에서의 유목은 이란이나 터키 같은 서부 아시아나 중앙아시아처럼 규칙적인 계절이동이 아니라 불규칙적인, 비정형적인 이동이라는 것이 그 특징이다. 이동 원인은 초지를 찾는 것이 주인이나, 때로는 가족이나 가축이 병들어 떠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 경우 라마승이 이동 방향이나 장소를 예시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비록 비정형적인 유목이지만, 연평균 이동 횟수나 이동 거리 및 하영지(下營地)에 따라 몽골의 이동 유목을 몇 가지 형태로 구분하기도 한다. 최근 데 바자르구르 등 학자들의 연구(1989년)에 의하면, 유목 형태를 크게는 산악형과 평원형으로 나누되, 세부적으로는 동영지와 하영지가 구별되는 항가이·헨티형, 알타이형, 고비형, 중부 및 동부 초원형 등 네 가지로 나뉜다. 요컨대 몽골의 유목은 계절이나 목장 형편에 따라 매우 유동적이다.

에르데니 조 사원 바깥의 카라코룸 고지(사진 위). 만안궁 터에 세워졌던 비신의 돌거북 기단(아래).

오후 4시쯤 나지막한 언덕을 넘자 드디어 ‘하르호린’이란 이정표가 나타난다. 저 멀리 마치도 푸른 주단에 백옥을 일렬로 상감하듯 촘촘히 박혀있는 백탑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그 속에 화려한 에르데니 조 사원의 기와지붕이 저물어가는 초원의 보랏빛 하늘을 배경으로 한 폭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여기가 바로 일세를 풍미하며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서방 나라들이 앞을 다투어 사신을 파견하고, 세계 곳곳에서 상품과 대상이 폭주하던 몽골제국의 첫 수도 카라코룸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유구(遺構)와 잔해들은 이 고도가 사라진 이후 만들어졌던 구조물들로서 그 자체가 고적의 흔적은 아니다. 아직도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이곳이 몽골제국의 첫 수도였다는 것이 밝혀지기까지는 숱한 연구와 논쟁, 지어 오인을 시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사실 카라코룸에 관해서는 <원사>를 비롯해 주와이니의 <세계정복자의 역사>, 카르피니의 <몽골인들의 역사>, 루브룩의 <여행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라시둣 딘의 <집사> 등 여러 사서에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적잖은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 기록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는 갑론을박 이론이 분분하다. 일찍이 프랑스의 동양학자 레뮤즈는 카라코룸 역사지리 연구의 선구자로서 <당서>에 근거해 위치를 추정하기는 했지만, 그만 오르콘강 상류에 있었던 위구르제국의 수도 카라바르가스와 혼동했던 것이다. 그의 연구와 이슬람 관련 사료를 꼼꼼히 검토한 사학자 도슨도 우구데이가 오르콘 강변에 궁전을 지었다는 사실만 밝혀냈을 뿐, 구체적인 위치 확인에는 실패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기간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와 현장 발굴에 의해 진상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몽골연대기 등 문헌에 의해 그 위치를 오른콘강 상류의 우안, 캉가이(杭海))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에르데니 조 사원 일원에 비정했다. 그러나 문헌기록에 의한 추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모든 유물에 대한 확증은 기록과 물증이 물합(勿合)될 때만이 비로소 인정되는 법이다. 다행히 카라코룸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물증이 몇 군데서 발견되었다. 에르데니 조 사원을 지을 때 인근에 있는 무너진 카라코룸 성채의 석재를 가져다가 썼는데, 방치된 일부 석재 중에서 카라코룸과 관련된 비문이 발견되었다. 러시아의 두 학자는 각각 한문이 첨부된 몽골어 비문 조각 2개와 3개를 수습했는데, 신통히도 동류의 조각들이다. 알고 보니 흥원각비(興元閣碑)의 잔해다. 이 잔해의 해석은 프랑스의 탁월한 동양학자 펠리오가 담당했다. 그가 원대의 문필가 유임(有壬)이 찬술한 <칙사흥원각비>(勅賜興元閣碑)의 비문 일부라는 것과 이 비는 원래 카라코룸 궁전 안에 세워졌던 비라는 점을 확인함으로써 사원의 건축과 고도의 관련이 밝혀졌다.

이러한 연구 성과에 바탕해 1948~49년에 러시아 조사단은 도시의 유적 일부에 대한 발굴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우구데이 궁전 유지에 대한 발굴작업의 결과는 루브룩 등 방문자들의 기록과 정확히 부합됨으로써 이제 이 고도의 위치는 최종적으로 낙점을 보게 되었다. 이처럼 문헌기록과 출토 유물, 그리고 서방 방문자들의 여행기록 등에 의해 이 몽골제국 첫 수도의 모습은 드디어 비교적 완벽하게 드러났다. 원래 이곳 이름은 몽골어로 ‘검은 자갈밭’을 뜻하는 ‘카라코룸’이었으나, 지금은 현지 발음으로 ‘하르호린’이라고 한다. 중국 문헌에는 ‘객라화림’(喀喇和林), 또는 약칭 ‘화림’으로 나온다.

일행이 타고 떠난 다섯 대의 미니 밴.

그렇다면 이 고도는 언제 어떻게 건설되었으며, 그 면모는 과연 어떠했을까? 원래 칭기즈칸 시대의 제국 중심은 케룰렌 상류였지만 거기서 더 서쪽의 오르콘 강가 카라코룸에 수도를 정한 것은 그의 둘째 아들이자 제2대 대칸인 우구데이 치세 때(1229~1241)다. <원사>에 의하면, 1235년 봄 우구데이는 오늘날 하르호린의 부근에 있는 ‘달란다비스(일흔 고개)’에서 소집한 ‘쿠릴타이’란 거대한 집회에서 이곳을 제국의 수도로 선포하고 건설공사를 시작해 불과 1년 만에 ‘만년궁’(萬年宮)이란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이 통설로 되었다. 그러나 ‘흥원각비’에는 칭기즈칸 15년, 즉 경신(庚辰)년(1220)에 도읍을 화림에 정했다는 기록이 있어, 펠리오 등 일부 학자들은 이를 근거로 1220년 칭기즈칸 건설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학자들은 칭기즈칸 당시는 군사근거지로서의 본영쯤은 될 수 있었으나 도읍은 아니었다고 반박한다. 우구데이는 금나라를 정복하고 개선한 후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북중국이나 이슬람 세계를 정복했을 때 데리고 온 공장들로 궁전을 짓고 정식으로 이곳을 도읍으로 삼았으며 궁전에 부속된 상공업 지역을 설치했다. 대칸은 왕자들과 귀족들에게도 주변에 높은 건물을 짓도록 했다.

이때부터 카라코룸은 제국의 수도로서의 웅장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다. 초원 도시로서 생존을 위해서는 물자공급이 절실했다. 이를 위해서는 교통수단으로서의 역참(驛站)이 필요했다. 카라코룸으로부터 각 정복지 사이에는 조밀한 역참망이 설치되었다. 특히 인접한 부국 중국 내지까지는 37개의 역참을 두어 교통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매일 각지로부터 식량과 술을 가득 실은 500대의 차량이 입성했다. 기록이나 유적을 미루어보면, 카라코룸은 대칸의 궁전과 궁성, 행정관리와 상공업자들의 거주구역, 그리고 온 도시를 에워싼 성채로 구성되어 있다. 대칸 우구데이는 궁전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1년의 대부분은 초원의 게르에서 여전히 유목민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 점에서는 3대 구유칸이나 4대 몽케칸도 마찬가지었다. 우구데이는 계절마다 행궁 게르를 바꿔가면서 정사를 봤다고 한다.

몽케 치세의 말년까지 3대에 거쳐 약 24년간(1235~1259)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의 면모에 관해서는 여러 방문기록들이 전해주고 있지만, 1254년에 이곳을 방문한 프란체스코 수도사 기욤 루브룩의 기록이 가장 구체적이고도 생생하다. 남향을 향해 중국식으로 지은 만안궁 입구를 화려하게 장식한 은제 나뭇가지와 사자의 입에서는 말젖과 포도주, 마유주, 봉밀주, 미주(米酒) 등 음료가 줄줄이 흘러내리고 전내에는 기둥이 두 줄로 맞서 있으며 맨 북쪽 대상(臺上)에 왕좌가 있다. 중앙 공간에는 헌주하는 대신들과 선물을 가져온 사신들이 대기하고 있다. 칸은 신처럼 정좌하고 있으며 그의 우측에는 남자들이, 좌측에는 여자들이 자리하고 있다. 황후 중 한 명만이 칸과 배석하고 있다. 그리고 4개의 성문이 달린 도시는 귀족관리와 무슬림(페르시아인이나 위구르인 등), 중국인들이 사는 3개 지역으로 나뉘는데, 무슬림 지역은 주로 상업구다. 성내에는 우상숭배(불교) 사원 12개소와 이슬람 마스지드 2개소, 교회당 1개소가 있다. 이처럼 다양하고 상이한 민족과 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사실은 몽골제국이 지향한 다원주의와 통합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국세의 승승장구에 편승해 일시 영화를 누렸던 이 초원도시는 단명일 수밖에 없었다. 에르데니 조 사원의 북쪽에 자리한 이 도시의 규모는 남북 150m에 동서 1000m에 불과하며, 잔해란 만안궁 터에서 비신을 받치고 누워있었을 법한 귀부(龜趺, 돌거북) 한 기뿐이다. 몽케가 죽자 그의 두 동생인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 간에는 치열한 계위다툼이 벌어져 결국 쿠빌라이가 승리하면서 수도를 대도(大都, 베이징)로 정하자 카라코룸은 서서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급기야 14세기 후반 원나라의 붕괴와 더불어 일세의 영화를 누렸던 이 고도는 지상에서 영영 그 자취를 감추고 만다. 역사의 무상함이다.

3. 몽골의 라마교 - 유목민 사로잡은 ‘주술적 불교’의 힘 2009.05.27 경향닷컴

2007년 6월30일, 몽골제국의 첫 수도 카라코룸(현 하르호린)의 옛터에서 보낸 시간은 비록 한나절이 채 안 되지만 실로 뜻 깊은 한때였다. 일세를 풍미하던 현장에서 칭기즈칸 후예들이 비상하던 그 경천동지의 기세를 조금이나마 음미할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의 현장에서 무언가를 찾아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한낱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유언 무언으로 그 현장을 증언하는 에르데니 조 사원은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티베트 시가체에 있는 반첸라마의 본찰인 타슈룬포궁 외관.


사실 몽골을 찾을 때마다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은 불교의 몽골 전파다. 그것은 불교의 몽골 전파야말로 종교 전파사에서 특이한 하나의 전범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아직껏 연구가 미급한 종교 전파의 초전(初傳, 혹은 私傳)과 공전(公傳, 혹은 公許) 문제, 접변(接變) 문제 등 종교 전파의 근본 문제가 일찍이 여기 몽골 땅에서 그 실마리를 풀어놓았던 것이다. 특히 근간에 와서 속칭 라마교라고 불리는 티베트 불교가 그 독특한 수행법과 포교법으로 지금까지의 전통적 불교 분류법을 밑뿌리째 뒤흔들고 있는 사정을 감안할 때, 이른바 장전불교(藏傳佛敎, 티베트에서 전래된 불교)라는 라마교에 대한 재인식은 절실하다 하겠다.

인도에서 출현해 세계 각지로 뻗어간 불교를 크게 작은 수레와 큰 수레로 대변하는 소승(남방불교, 히나야나)과 대승(북방불교, 마하야나)으로 나누며, 라마교는 대승계통의 한 밀교 분파쯤으로 여기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념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티베트 불교에 관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불교에는 소승이나 대승과 더불어 라마교로 대표되는 금강승(金剛乘, 바즈라야나 혹은 탄트릭 부디즘)이라는 제3의 계통이 설정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으며, 대체로 그 주장이 긍정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전불교로서 티베트 불교와 한 맥을 이루는 몽골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현장에서 살펴보는 것은 시의적절하고 유의미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몽골 불교는 장전불교인 것인 만큼 그 원류인 티베트 불교를 찾아보고 그 전파 과정이나 전파 중에서 일어난 접변 같은 것을 비교검토해 보는 것은 몽골 불교의 심층적 탐색을 위해선 필수적 작업일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을 엮기에 앞서 지난 5월10일부터 8일간 티베트 현지를 찾아갔다. 라싸에서 달라이라마의 겨울 궁전인 포탈라 궁과 여름 궁전인 노블링카 궁, 송첸캄포가 네팔과 당에서 시집온 공주들을 위해 세운 티베트 최초의 사원 조캉 사원, 장체에서 백색 쿰붐 사원, 티베트 제2도시인 시가체에서 판첸라마의 본찰인 타쉬룬포 사원 등을 두루 돌아봤다. 역시 몽골 라마교의 본향답게 규모면에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클 뿐만 아니라, 오랜 역사만큼이나 내용이 다양하고 심원하며 형식에서도 민족적 특색을 나타내고 있다. 그렇지만 본질에서는 그것이 그것이어서 여러 가지 공통점과 공유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장체험은 몽골 불교-라마교를 재량(裁量)하는 데 큰 지침이 되었다.

몽골인민공화국 국장의 원형인 중앙사의 국장(國章).

흔히들 티베트 불교나 몽골 불교를 통틀어 ‘라마교’(喇마敎)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은 국적불명의 용어다. ‘라마’는 산스크리트어로 ‘구루’, 즉 스승을 일컫는 단어로서 원래는 티베트 승려 중에서 전생을 기억할 정도의 뛰어난 수행력을 가진 대덕고승에 대한 존칭으로서 일반 승려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지칭이다. 가령 ‘달라이라마’에서 ‘달라이’는 몽골어로 ‘큰 바다’라는 뜻이며, ‘라마’는 대덕고승, 즉 ‘대사’(大師)를 가르키니, ‘달라이라마’는 ‘바다 같이 큰 지혜를 가진 대사’란 의미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라마승’은 있어도 ‘라마교’는 없다. 그럼에도 언제부터인가 누구에 의해 잘못된 말 ‘라마교’가 씌어지기 시작한 후 회자되면서 관행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이렇게 역사에는 왕왕 어불성설이라도 관행으로 굳어져버리면 정설로 둔갑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아무튼 관행으로 굳어져 버렸다손 치고 티베트에서 몽골로 전래한 밀종 불교, 즉 장전불교를 일단 라마교로 명명하자. 그렇다면 이 불교가 언제 들어왔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일반적으로 16세기 후반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즉 1575년 남몽골의 알탄칸이 티베트 불교의 겔룩파(黃敎, 黃帽派)에 속한 고승 소남갸초에게 달라이라마라는 칭호를 수여하고 이 파 불교를 신봉하며 시주가 될 것을 선언한다. 그후 10년이 지난 1585년 북몽골 할흐 지방의 압타이사이칸이 옛 몽골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에 티베트 불교의 싸갸파(花敎) 고승을 초청해 에르데니 조 사원을 건립한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불사(佛事)를 라마교의 몽골 전파 시점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그러했을까?

여기에는 종교 전파에서 제기되는 한 근본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몽골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라서 한번 짚어봐야 할 것 같다. 불교나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보편종교에서는 지연이나 혈연구조에 입지한 자연종교와는 달리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의 종교적 이상까지도 추구하려는 노력, 즉 포교나 전도(미션)를 통한 전파가 맹렬히, 그리고 간단없이 진행된다. 이와 같은 종교 전파는 자연적으로 전달과 변용(變容)의 과정을 거치는 바, 타지에 대한 한 종교의 전래 시원(기점)은 으레 초전 단계인 전달에서 찾아야 하며 초단계적으로 변용을 그 시원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러한 초전 단계에서는 왕왕 이질적인 토착신앙(종교)으로부터의 저항이 있기 때문에 전파는 비밀리에 잠행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초전과정을 구체적으로 명백히 추적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며, 때로는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그 결과 초전(전달)활동은 무시된 채 기록, 그것도 공전을 기준으로 한 공식기록에만 의존해 판단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몽골에서의 불교 초전 과정이나 우리나라 삼국시대 불교의 초전 과정은 유사한 경우로서 이러한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몽골의 경우 라마교는 초전단계에서 토착 전통신앙인 샤마니즘과 여러 면에서 맞부딪치면서 진퇴를 거듭한다. 급기야 대권자인 칸들의 공인 공허에 의해 전통신앙을 근본적으로 뒤바꾸는 변용단계에 이르러 라마교는 국교로서 공식화된다. 공허에 앞서 진행된 초전 사실을 여러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료에 대해 일부 논자들은 그저 ‘불교와 관련된 최초의 언급’이라느니, ‘불교와의 최초 접촉’이라느니 하는 등 표현을 쓰지만, 그것이 초전(사전) 현상이라는 것까지는 갈파하지 못하고 있다.

과문으로는 몽골 관련 문헌 중에서 최초로 불교와 관련된 기사는 <몽골비사>에 보인다. 이 기사에 따르면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가 1227년 몽골에 항복하면서 마지막 군주인 이현(李睍)이 칭기즈칸에게 보낸 공물 가운데 수메스라는 이름의 진귀품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불상이다. ‘수메스’는 후일 몽골인들이 불교를 정식으로 수용하면서부터는 불교 사찰을 뜻하는 ‘숨’으로 와전된다. 13세기 중엽 루브룩을 비롯한 서방 선교사들이나 사신들이 수도 카라코룸을 방문하고 남긴 여러 여행기에는 당시 이곳엔 불찰이 12개소나 있으며, 사원 내에선 밀종의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으로 알려진 ‘옴 마니 반메 훔’을 주송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원사>에도 헌종 때 해운(海雲) 화상이 불사를 주관하고, 캐시미르 출신의 불승 나마(那摩, 나모)를 국사로 모셨다는 기록이 나온다. 카라코룸을 수도로 정한 우구데이칸의 아들 커턴이 티베트를 진공할 때 영입한 싸갸파의 지도자 사카판디타에 의해 불교로 귀의했다고도 전한다.

에르데니 조 사원 중앙사의 불상.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16세기에 이르러 몽골이 라마교를 국교로 공식 받아들이기 이전 300~400년 동안의 초전단계에 여러 경로를 통해 라마교가 스며들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러한 초전단계가 있었기에 비로소 전통적 신앙이 버려지고 대신 새로운 종교신앙-불교가 자리하는 사회적 대변용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변용은 대대적인 불사의 건설과 전생(轉生)에 의해 종교의 최고통수권이 보장되는 활불제(活佛制)의 도입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할흐 몽골(외몽골)에서 라마교에 귀의한 압타이사인칸은 1586년 몽골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가장 큰 라마교 사원인 에르데니 조 사원(‘보석과 같이 귀중한 사원’이란 뜻)을 바로 이곳 카라코룸에 세웠다. 이 사원은 부지면적 0.16㎢(400m×400m) 위에 세워진 하나의 대규모 가람군으로서 모두 18개의 가람과 그 부속건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으며, 그 건축 연대는 일치하지 않다.

서문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가람군이 눈에 띄는데, 그 한가운데 흰색 사리탑(소보르간탑)이 우뚝 솟아있다. 이 탑 왼쪽에는 이른바 3사(寺, 고르반 조)라고 하는 중국 양식의 가람 3동이 가지런히 배치되어 있다. 한가운데의 중앙사는 1585~87년에 지어진 건물로 가람군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그 왼쪽과 오른쪽엔 각각 17세기 초엽에 세운 서사(西寺)와 동사(東寺)가 자리하고 있다. 소보르간 백탑의 오른쪽에는 18세기 초에 티베트 양식으로 지어진 라프란 사원이 있는데, 이 사원은 승려들의 수행 장소 역할을 한다. 3사를 비롯한 건물마다에는 귀중한 각종 불상과 불화, 경서 등이 소장되어 있다. 이 가람군 건물들은 인접한 옛 수도 카라코룸의 궁전이나 사원의 잔해 자재들을 가져다가 지었다는 것이 남아 있는 주춧돌의 문양이나 명문에서 입증되었다. 경내에는 칭기즈칸이 이곳을 지나 서진할 때 썼다는 대형 무쇠솥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 정사각형의 가람군은 20m 간격으로 하나씩, 총 108개의 백색 탑이 마치 푸른 주단 위에 박아넣은 흰 옥처럼 사위를 빙 둘러싸고 있어 에르데니 조 사원의 풍채를 한결 돋보이게 한다. 에르데니 조 사원의 건립을 기점으로 하여 도처에서 라마사원 건설이 꾸준히 진행되어 왔다. 울란바토르에서 그 대표적인 건물 몇 개소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중에는 1838년 제5대 활불에 의해 세워진 간단 데그친렌 사원과 1919년 제8대 활불이 세운 복트칸 겨울 궁전이 있다. 오늘날 간단 사원은 현대 몽골 라마교 부흥의 본산으로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몽골인들이 샤마니즘을 포기하고 정통 불교에서 보면 좀 이탈적인 밀종계의 라마교를 받아들인 데는 그럴 만한 역사적 배경이 있다. 그것은 자연종교로부터 보편(이상)종교로의 이행이 불가항력적인 사회진화라는 점 말고도, 몽골 특유의 자연환경이나 사회문화 배경과 관련이 있다. 적막과 고독만이 감도는 초원에서 유목민들의 정신에 그나마도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은 고요함에서 우아함을 청하는 침정담아(沈靜淡雅)의 수행보다는 주술적인 독경이나 장엄한 음악, 현란한 색채 같은 극적이고 신비적인 동적 자극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밀종일진대, 그것이 바로 구태신앙에서 벗어나려는 몽골인들에게는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이와 더불어 라마교는 출가승이라도 가족과의 유대를 유지하게 하고, 육식을 부정하지 않음으로써 유목사회의 유지를 가능케 하는 등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몽골인들의 일상에 부합되는 신앙인 것이다. 비록 이런 속에서 오늘로 이어져왔지만, 전통과 현대의 갈등과 괴리라는 시대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는 몽골 라마교가 직면한 난제가 아닐 수 없다.



4ㆍ칭기즈칸의 서정(西征)길을 따라-
게르(텐트식 이동가옥)서 여장 풀고 느껴본 몽골군의 자취-2009.06.03 경향닷컴

몽골 서정군의 이동 지휘부 조형물.


해가 서산에 기울어지자 그러잖아도 조금은 을씨년스럽던 하르호린(옛 몽골제국의 첫 수도 카라코룸)의 하늘은 잔뜩 먹구름으로 뒤덮이기 시작하면서 난데없이 바람도 윙윙거린다. 운전기사들의 얼굴에는 근심기가 서린다. 목적지 체체를레크까지 남아있는 120㎞의 밤길을 가야 하는데, 달빛이나 별빛이 구름에 가려진다는 것은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먼 길을 달려 온 데다가 이 고도의 옛터를 구석구석 살펴보느라 다들 맥도 빠졌거니와 시장기가 들었다. 근교의 깔끔한 게르 식당으로 안내되어 쇠고기 덮밥으로 허기를 채웠다. 심신이 나른해진 일행에게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화림’(和林) 이야기를 꺼냈다. 이 고도의 한자 이름은 음사로서 ‘화림’인데, 뜻을 풀이하면 ‘평화의 숲’이라고 운을 뗐다. 맞거나 말거나 엉뚱한 풀이다. 마유주 한잔씩을 치켜들고 ‘화!’에 ‘림!’으로 화답하면서 건배를 했다. 다들 얼굴에 활기가 내비친다. 일단 야행을 앞둔 기분전환에는 성공한 셈이다.

녹녹잖은 초원길이다. 우리가 에르데니 조 사원 정원에서 본 대형 무쇠솥은 칭기즈칸이 이끈 서정군(西征軍)이 쓰던 것이라고 하니, 서정군은 분명 이곳에서 출발했거나 이곳을 지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일행은 이제부터 1700여년 전 칭기즈칸이 서정에 올랐던 그 길을 비록 오롯하지는 않지만 더듬더듬 찾아가는 것이다. 그 길에 찍혀진 발자국과 길 위에 남겨진 유적·유물들은 서정이란 장거에 관해 유언무언으로 증언할 것이다. 그 증언을 현장에서 확인하고파 이렇게 불원천리 찾아 온 것이다.

첸헤르 온천 휴양지의 게르식 식당 내부.

어두움이 짙게 깔리기 시작한 밤 8시, 일행에게 칭기즈칸의 서정길에 관해 간단하게 브리핑을 하고 길을 떠났다. 초원엔 길이 없다. 지나간 자국이 곧 길이다. 밤이면 더더욱 그러하다. 유일한 물표(物標)는 달이나 별이다. 그런데 그 물표가 짙은 구름에 완전히 가렸으니, 초원은 문자 그대로 칠칠흑야다. 길 아닌 길을 가다보니 밴은 상하좌우 무법으로 요동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리네 밴은 두 번이나 타이어가 펑크 났다. 몇 번이고 기사들은 차를 멈춰 세우고 구수회의를 한다. 이 길을 자주 오갔다는 노련한 기사들도 도시 얼떨떨한 모양이다. 통상 3시간이면 족히 닿을 그 목적지는 여섯 시간이 훨씬 넘어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리무중이다. 할 수 없이 차를 멈춰 세우고 노숙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야밤에 초원이나 사막에서 길을 잃었을 경우는 허둥대지 말고 제자리에 딱 붙어서 날이 밝기를 기다리는 것이 하나의 수칙이다.

수칙대로 할 것을 결심하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노라니, 문뜩 몽골군이 서정할 때 일어났다는 한 토막 전설이 요행을 예고나 한 듯 기억에 떠오른다. 어느 날 한 분견대가 그만 사막에서 길을 잃고 아사지경에 처한다. ‘노마식도’(老馬識道), 즉 ‘늙은 말은 길을 안다’라는 속담을 믿고 늙은 말 한 필의 고삐를 풀어놓았다. 말은 몇 바퀴 주위를 돌다가 무엇을 알아냈는지 곧장 서북 방향으로 뛰어간다. 따라가 보니 푸른 호수가 나타나 물을 실컷 마시고 기사회생했다. 호수가에 나와 보니 우거진 숲 속에 몇 채의 게르가 보인다. 한 게르에 찾아가 사정을 말하니 노부가 아이라크(소젖 요구르트)를 건네준다. 그런데 그 맛이 방금 전 호수에서 마신 물맛과 신통하게도 똑같다. 이것이 호수가 젖이 되어 서정군을 구출했다는 ‘아이라크호 전설’이다. 전설은 현실 그 자체가 아니라, 현실에 대한 기대이고 암시일 뿐이다.

다들 포기하고 눈을 붙일 채비를 하고 있는데, 적막 속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온다. 귀가 솔깃했다. 순간 그쪽에서 섬광이 번뜩인다. 기사들 중 연장자인 4호차의 진네가 어느새 개 짖는 곳을 알아내고 찾아가 우리들에게 신호를 보내온 것이다. 함께 달려가니 두 채의 게르에서 두 아주머니가 기지개를 켜며 우리 앞에 나타난다. 한 사람은 짖는 개를 달래고, 다른 한 사람은 갈 길을 알려준다. 새벽의 단잠에서 깨어났으련만, 그렇게 스스럼없이 마치 지인을 만난 듯 친절하다. 덕분에 한 시간 남짓 더 달려 드디어 새벽 3시쯤에 체체를레크에 도착했다. 첫날 여행치고는 꽤 벅차다. 19시간 동안 514㎞를 주파했으니 말이다.

우리가 답사 첫날 밤 여장을 푼 곳은 유명한 첸헤르 온천 휴양지의 게르다. 6월 그믐인데도 게르 안은 한기가 감돈다. 난로에 장작을 피워놓고서야 안온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네 시간도 채 못자고 기상했지만 간밤의 초조와 피곤은 가뭇없이 사라지고 다들 활기에 차있다. 이곳은 온천 야영소로서 20여채의 게르가 목책 속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사위는 짙푸른 주단을 깔아놓은 듯 목초로 뒤덮인 언덕과 야산으로 에워싸여 있다. 어느새 말과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야영소의 한 모퉁이에 마련된 공동식당은 40~50평의 넓은 공간인데 게르식이다. 어떻게 이렇게 큰 게르를 지을 수 있을까. 게르에서 첫날 밤을 보내고, 앞으로도 여러 밤을 그렇게 해야 하는 일행. 특히 초행자들에게는 게르 생활이 신기하기만 하다. 그래서 삼삼오오 모여 앉아 게르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원래 인간의 의식주는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영향이 절대적이다. 몽골과 같은 유목사회에서 생계의 기본수단은 목축이며, 목축은 자연환경의 영향을 그 어느 경제형태보다도 많이 받기 때문에 유목민들의 의식주는 그 내용이나 형태에서 이동적인 목축경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거주에서 그런 사실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원래 고대 몽골에는 고정된 가옥과 분해해서 운반할 수 있는 텐트식 가옥의 두 형태가 있었으나 지금은 텐트식 가옥 한 종뿐이다. 그런데 이 가옥 형식도 역사발전에 따라 그 면모를 달리해 왔다.

몽골의 게르 외형.

몽골제국 이전에는 적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수백가구가 서로 어울려 사는 쿠리엔식 텐트 가옥이었으나, 제국 이후에는 방어라는 필요성이 없어진 데다 목축생산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분산 거주하는 아일식 텐트 가옥(보통 2~5가옥)이 성행하기 시작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아일식인 경우 가장 오른쪽 게르는 연장자의 것이고, 가장 왼쪽 게르는 창고 등으로 쓰인다. 칸이 거주하는 오르도(게르의 높임말)의 오른쪽으론 누구도 지나갈 수 없다. 겨울이나 봄엔 매서운 북서풍이 불기 때문에 문은 항상 남쪽으로 낸다. 게르의 재료는 나무와 펠트인데, ‘게르의 뼈대’라고 하는 나무재료는 둥근 천창과 천장의 서까래, 벽, 문틀 등이다. 천창은 느릅나무 같은 단단한 나무로 만들어 서까래와 연결시키고, 벽은 주로 버드나무를 엇갈리게 엮어 접었다 폈다하는 신축성이 있어 계절에 따라 높이와 너비를 조절한다. 게르의 외벽은 보통 5~6짝의 펠트로 덮는데 여름에는 한 겹으로, 겨울에는 두 겹으로 한다. 펠트가 드리운 문을 출입할 때는 문의 바른쪽을 들어올리고 출입한다.

게르에는 엄격한 내부질서가 있다. 지을 때는 맨 먼저 화로를 설치한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하고 가신제를 떠맡게 될 막내아들을 ‘화로를 지키는 아들’, 즉 ‘가계를 지키는 아들’이라 부른다. 게르 안의 북서쪽은 신성한 장소로서 거기에 불단이나 우상을 모시며, 출입문에서 왼쪽은 남자 자리고 오른쪽은 여자 자리다. 가재도구의 배치도 이 원칙에 따른다. 남자 자리에 마구나 무기 등을, 여자 자리에 조리기구나 유제품 제조 도구 들을 놓는다. 손님은 활과 화살 등 무기류를 휴대하고 게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게르 입구에 빨간 천조각이 장식되어 있으면 출산을 의미하고, 한낮에도 천창이 덮여 있으면 상사가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이럴 경우는 출입을 삼간다. 뒷간은 숲이 무성한 곳이나 움푹한 곳을 택하며 배설물은 대부분 개가 처리한다. 뒷간 간다는 말을 몽골어로 남자는 ‘말 보러 간다’, 여자는 ‘말젖 짜러 간다’고 표현한다.

게르는 몽골인들의 우주관을 집약하고 있다. 임신부가 진통을 시작하면 긴 실 한 타래를 화로 부근에서 기둥에 감아 천창 밖으로 내어 묶는다. 이것은 인간의 생명은 하늘이 내려준다는 신앙에 바탕한 관습이다. 게르의 나무 기둥은 우주목으로서 샤먼이나 영혼이 그것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들은 게르를 해시계로도 이용한다. 천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닿는 곳을 보고 시간을 헤아린다.

게르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마치고 주변을 한 바퀴 산책했다. 따사로운 아침 햇살에 피어나는 푸름의 ‘내음’은 싱그럽기만 하다. 그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첸헤르 온천에서 끌어온 온천수를 저장하는 수조(水槽)다. 노천 수조다 보니 수온은 자연수온으로 내려갔지만 거울처럼 맑으며, 광물질 냄새가 약간 풍긴다. 만져보니 미끌거린다. 이 물을 걸러서 식수로 쓰기도 하고 가열해서 욕조에 보내기도 한다. 이 온천수는 약 5리 밖에 있는 첸헤르 온천에서 관을 통해 끌어온다. 사실 몽골에는 40~50도에 달하는 온천이 적잖게 있다. 동북부의 헨티 산맥에서 발원하는 오논강변에는 20개소의 온천이 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노욘할롱 온천이다. 목민들은 겨울철이 되어 산지의 소택이 얼어붙으면 온천을 찾아 떠난다. 얼어붙지 않는 온천은 치료에 효용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음료수원이 되기도 한다. 온천수에 버터를 섞어 마시기도 한다.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이 첸헤르 온천이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보르칸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르칸산, 그것은 밝음을 주는 마음 속의 성산이다. <몽골비사>의 첫 구절은 이런 말로 시작한다.

‘칭기즈칸의 근원은 이미 하늘에서 정해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잿빛 반점을 지닌 늑대이다. 그의 부인은 황금색 털을 지닌 암사슴이다. 이들은 탱기스호를 건너 오난하의 상류에 있는 성스러운 보르칸산에 거주지를 정했다.’

이렇게 천손(天孫)을 자부하는 몽골계 민족들은 하늘의 밝은 빛을 받아 무궁토록 번영하는 곳이 바로 보르칸산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에게 이 성산은 고정된 산이 아니라 마음 속에 살아있는 믿음의 산이며, 하늘의 빛이 이르는 곳을 따라 이동하는 자유로운 산이다. 이동을 숙명으로 삼는 유목민들에게는 희망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특히 대칸들은 보르칸산을 자기 주변에 두고 싶어 하며, 주변의 어느 한 산을 보르칸산으로 정해 놓고는 성대한 제천의식을 거행한다. 아마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저 보르칸산도 바로 그러한 마음 속의 성산, 희망의 성산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옷깃이 여며진다. 우리의 고대문화를 하늘의 뜻이 전달되는 그러한 성산의 의미와 연결시켜 이른바 ‘불함론’(不咸論)으로 정리하는 견해도 있어 북방문화와의 상관성을 짚어보게 한다.

첸헤르 온천 휴양지.


아쉽게도 시간에 쫓기다나니 온천욕은 못한 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첸헤르 온천 야영소의 입구에는 그 옛날 몽골 서정군이 사용하던 대형 게르 조형물(지금은 아트 숍으로 이용)이 전시되어 있다. 여러 필의 말이나 소가 끄는 차량 위에 얹혀 있으며 군기를 꽂는 자리가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서정군의 이동 지휘부임이 분명하다. 대형 무쇠솥이 발견된 에르데니 조 사원이 있는 카라코룸에서 출발한 서정군은 이러한 이동 지휘부의 휘하에서 이곳을 지나 서정의 길을 이어갔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칭기즈칸이 열어놓은 그 서정의 길을 밟아보고 있는 것이다.

<문명사학자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

정수일은 누구인가?

 
학력 : 연변고급중학교, 1949~1951, 중국 연변
북경대학 동방학부, 1952~1955, 중국 북경, 학사
카이로대학 인문학부, 1956~1958, 이집트 카이로
튀니지대학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 1980~1981, 석사
단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 1984~1989, 문학박사
전공 : 문명교류사
 
경력 : 중국외교부, 연구관, 1958~1959
모로코주재중국대사관, 연구관, 1960~1963
평양국제관계대학 동방학부, 교수, 1964~1968
평양외국어대학 동방학부, 교수, 1969~1974
말레이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교수, 1982~·1983, 말레이시아
단국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 1988~1996
한국외대, 부산외대, 명지대 출강, 1984~1993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성균관대, 성공회대 출강, 2002~2008
 
저서 : 신라-서역교류사 (단대출판부, 1992)
세계 속의 동과 서 (문덕사, 1995)
기초 아랍어 (단대출판부, 1995)
씰크로드학 (창작과비평사, 2001)
고대문명교류사 (사계절, 2001)
문명교류사 연구 (사계절, 2002)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 (효형출판, 2002)
이슬람 문명 (창비, 2002)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창비, 2004)
한국 속의 세계 (상·하) (창비, 2005)
실크로드 문명기행 (한겨레출판, 2006)
실크로드의 삶과 종교 (공저, 사계절, 2006)
 
 역주서 : 이븐 바투타 여행기 (1,2) (창작과비평사, 2001)
중국으로 가는 길 (사계절, 2002),
왕오천축국전 (학고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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